[칼럼]잊혀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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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잊혀진 질문
  • 최병현 미래인재역량개발연구소 대표
  • 승인 2018.07.16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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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현 미래인재역량개발연구소 대표

[뉴스깜] ‘왜 사느냐고 물으면 웃지요!’ 웃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이가 없어서 일까? 아니면 삶을 달관해서 웃는 것일까?
 

소년티가 가시지 않았던 청년시절, 선배에게 치기 어린 질문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이고 왜 사느냐고?’ 물어보았다. 찬바람이 세찬 목로주점에서 선배가 던져주던 말은 ‘네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였고  선문답 같은 선배의 이야기가 아리송했다.

그 이후, 삶과 치열하게 마주하면서도 ‘왜 사느냐’는 질문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사는 세상살이는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다원」은 모든 생명체의 생존방법은 경쟁과 협업이고 강한 종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생태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라고 말한다. 결국 인간이라는 종(種)도 이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

 경쟁은 모태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시작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미운 일곱 살’이 되면 부모들은 경쟁을 위한 준비운동을 시킨다. 그래서 친구와 유치원도 가려서 보내고 학원에도 떠밀듯 내보내며 내공을 키운다.

 점차, 10대에 들어서면 소질이나 적성은 무시된 체, 오직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한 피 튀기는(?)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된다. 어느 학과가 문제가 아니다. 어느 학교에 입학하느냐가 관건이다. 출신학교는 왕조의 골품제와 같은 효능을 가지고 있다.

 20대가 되면 취업 전쟁이 시작된다. 많은 젊은이가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돈 많이 주고 복지가 잘된 직장에 영혼이라도 팔아야 한다. 취업을 위한 소위 말하는 스펙을 쌓으며, 학벌과 학점, 어학연수, 인턴십, 자격증, 공모전, 봉사활동, 성형수술도 덧붙여진다. 공개경쟁시험 시험은 소수점에 소수점 이하의 점수로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잔인한 게임이다.

 30대, 어느 직장을 가졌는가에 따라 결혼상대가 정해진다. 물론 부모의 사회경제적 위치도 저울질 된다. 이 시점에서 신혼살림을 꾸릴 여력이 없는 젊은이들은 좌절하고 결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오죽하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에 이어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N포 세대가 등장했을까?

 특히나 힘든 취업관문을 통과하여도 숨 돌릴 여유조차 없다. 녹녹치 않은 직장생활에 살아남기 위해서 또 다시 자기계발에 뛰어들어야 한다. 다행히 계획되고 의도된 삶이라면 견뎌 내는데, 철저히 타율적인 삶은 숨 막히기 십상이다. 통계에 따르면 대학졸업생의 직무와 전공 일치도는 43% 정도라고 한다.

 취업과 결혼의 힘든 30대의 터널을 지난다. 不惑之年의 40대에 다가서면 이상은 현실과 이미 멀리 떨어져 있다. 안정된 가정과 아이들의 학비걱정 때문에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힘들다. 이젠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버티기로 돌입한다.

 퇴직은 빠르나 은퇴는 가장 늦은 나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경쟁에 매몰되어 인생의 태반을 먹고살기 바쁘게 살아왔다. 노년을 위한 준비가 따로 있을 리 만무하다. 준비되지 않은 노년은 재앙이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죽도록 노력해야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나라의 실상이다.

그래서 노인의 자살률과 노인빈곤률이 세계최고인지도 모른다. 평생을 열심히 살아온 죄 밖에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대한 회의를 한다. 우울하다. 쓸쓸하고 외롭다고들 말한다.
 경쟁에 매몰된 체 원초적인 생명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아름다운 자기 삶의 실존을 찾아서 사는 사람도 있다. 계획되고 의도된 데로 사는 전략적인 삶도 있고, 때론 의도하지 않은 채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하여 적응하는 창발적인 삶도 있다.

 어느 유형의 삶이든지 성공적인 삶은 사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먼저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지탱하게 해주는 힘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는 아무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부를 위한 치열함이나, 즐거움의 추구, 영혼까지 태울 듯 한 사랑도 우리가 사는 의미가 될수 있다. 조금 더 성숙된 자아는 가족이나 이웃, 나아가 사회속에서 봉사와 배려 등 이타적인 활동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한단계 확장 시킨다.

그리고 주어진 삶에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정신없이 살면서도 가족들의 행복한 웃음, 우정, 마음 훈훈한 이웃들이 있어서 언뜻언뜻 구름 속에 햇빛도 보이고, 장마 끝에 맑은 하늘도 보인다. 그리고 이때서야 ‘왜 사느냐고 물으면 웃지요!’ 의 의미를 스스로 되새겨본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랄프 알도 에머슨, ‘성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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