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만 남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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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만 남은 역사
  • 오명하 기자
  • 승인 2018.08.1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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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병현, 미래인재역량개발연구소 대표

[뉴스깜] 칼럼 =  가스실의 죽음에서 거두어들인, 어린아이부터 늙은이의 머리카락들이 유리 상자 속에 가득하다. 윤기 흐르던 두 갈래 처녀의 금발도, 꽃향기 흐르던 신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도 베어져 양탄자로 만들어졌다. 수용소를 운영하던 관리자들은 그 양탄자 위에서 곡을 연주하고 화려한 춤사위를 곁들인 연회를 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이었다. 정말 인간은 얼마나 잔인할 수 있을까?
 부다페스트의 다뉴브강 변에는 파시스트 민병대에게 살해되기 직전, 강으로 뛰어들었던 사람들의 신발 조형물이 강을 지키고 있다. 실감 나는 조형물이 그때의 다급함과 잔혹한 역사를 말해준다. 사람들은 오늘도 그 잔혹함과 시련의 시간을 기억한다.
 한편, 1919년 4월 15일, 그날 오후 2시, ‘제암리 교회’는 순한 산등성이를 등에 지고 앉아 있었다.  21명의 주민이 일본군에 이끌려 교회당에 모였다. 왜군들은 모든 문을 빗장으로 단단히 막았다. 남편을 찾아온 여인 2명은 칼로 난도질하여 죽인다. 이어서 교회 건물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후 총질을 했다. 비명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총성은 그 비명들을 덮어버렸다. 4월의 하늘은 검붉은 화염으로 햇볕조차 무색하게 하였다. 그 이튿날에도 삼십 리 밖까지 재가 날아가고 송장 타는 냄새가 났다고 증언한다.
 동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후 ‘제암리’를 방문하였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 샛길을 통해 제암리 학살 현장에 들어선다. 기념관은 기분 좋은 선선함을 유지하고 있다. 전시실엔 사진 몇 장과 몇 점의 신문, 판결문 등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2전시실에는 세계에서 발생한 인간 학살에 대한 연표와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는 전시물과 글들로 어지럽다. 사과하고 사죄하면 용서하겠는 외침이 공허하다는 느낌이 든다. 구걸하여 사죄를 받고 용서하는 것은 진정한 사죄는 아닐 터이다. 그런데도 사죄를 구걸하고 평화를 위한 화해와 용서를 하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낮 뜨겁고 허망한 일인가? 그런데도 사과조차도 하지 않겠다는 심보와 그것이라도 받아내겠다는 민망한 사람들, 약자의 슬픔이 느껴진다.
 사진 몇 장과 몇 편의 글로 그 처절하고 다급했던 제암리의 참상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살아 숨을 쉬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 먼저다. 불타 없어지고 세월에 묻혔으면 많은 증언과 사진 자료를 토대로 원형에 가깝도록 재현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불태워진 순국의 자리에 서 있는 아름다운 기념탑에서는 나는 안타깝게도 아무런 감동도 공감도 할 수 없었다.
 제암리교회 추모공원과 외떨어진 마을 앞 버스정류장 뒤편에는 관리되지 않고 잡초에 뒤덮인 추도시가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비바람 지나간 스물여섯 해/두렁 바위 들꽃에 이슬이 방울방울/불에 타고 총칼에 쓰러진 임들의 한 맺힌 넑이드뇨/조국을 찾으려한 장한 그 뜻/이제 겨레의 산 힘이 되었기에∙∙∙<박세영, 추도시, 1946>” 망가진 석조물 몇 점과 월북 시인의 추도시가 잘 꾸며진 추모공원에서의 느낌보다 가슴을 더욱 절절하게 한다.
 우리 주변에서는 나치의 잔혹함에 못지않은 일제의 만행 현장을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독립기념관이나 서대문형무소, 윤봉길 의사의 생가, 유관순 열사의 기념관 등이 고작이다. 주변에 수없이 산재했었던 독립운동 사적지에 대한 보존에 소홀했던 결과다. 그러다 보니 독립운동과 그 만행의 현장들 대부분은 멸실 되거나 흔적조차 없어졌다. 그나마 남아있는 사적들도 “감동을 주는 즐거운 문화공간”을 만든다는 핑계로 공원화되었다. 일부 잘못 조성된 공원에서는 독립운동 관련 사적들과 유물들이 문화공간을 조성하는 장식용 소품 정도로 취급된다. 껍데기만 독립운동 사적지일 뿐이다. 이미 그곳에는 치열했던 독립에 대한 열망도, 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일제의 잔학성도 없어져 버렸다. 본질이 훼손된 곳에는 껍데기뿐인 구호와 허례가 난무할 뿐이다.
 역사적 사실을 공감하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글보다는 한 장의 사진, 사진보다는 역사적 사실이 일어난 현장 보존이 중요하다. 그곳에서만 보고, 느끼고, 체감할 수 있는 진실성과 실제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일제 만행은 없었다. 잘 다듬어진 추모공원만이 있을 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느꼈던 충격이나 부다페스트 강변, 벗어 던진 신발 조형물에서 가졌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느껴볼 수 없었다. 기억하기 불편한 역사는 이렇게도 묻혀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3.1운동 후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또(齌藤實)’는 조선의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여,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말살하는 ‘문화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셈이다. 어찌 보면 역사적인 독립운동 사적이나 유물들의 사실성을 장식용 소품 정도로 꾸며서 왜곡 전시하는 것도 ‘사이토의 문화 정책’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나만의 지나친 생각일까?


 역사는 사실이다. 현장의 ‘생생한’ 역사적 사실을 현재의 눈으로 보면 과거가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미래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다. 그러나 어떤 사실이 있다고 해서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의미를 부여하여야 한다. 결국, 역사란 단순한 사실이 아니고 널리 인정하게 된 일련의 판단이며,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과 ‘감동’을 통하여 지켜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오감과 육감을 통해 감동으로 생생하게 살아나는 부활의 역사적 공간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최병현, 미래인재역량개발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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