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조선은 노예사냥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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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조선은 노예사냥터 였다
  • 최병현 미래인재역량개발연구소 대표
  • 승인 2017.11.18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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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현 미래인재역량개발연구소 대표

조선은 노예사냥터 였다

[뉴스깜]= “들도 마을도 산도 모두 불 태우고 사람은 잘라 죽인다. 산 사람은 쇠줄과 대나무로 목을 묶어 끌고 부모는 자식 걱정에 울부짖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메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 처음 보았다(조선일일기, 慶念(일본종군승려), 1599) ” 지옥보다 더한 살육 전쟁에서, 노예로 잡혀간 백성들은 한성 인구인 10만을 상회하여 20만을 넘어섰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마카오, 피렌체 등 세계 각지로 팔려나간 조선의 노예로 인하여 세계 노예 시장의 값이 폭락(조선인2.4스쿠도, 아프리카인 170스쿠도, 페루인 400스쿠도)했었다고 할까(KBS 역사저널그날)왜란(임진왜란, 정유재란)이 지난 후, 불과 28년 만에 또다시 호란(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다.

굶어죽고, 얼어 죽고, 맞아죽고, 짐승에 물려죽고, 그렇게 하고도 모진 목숨 연명한 사람들은, 줄로 목이 묶이어, 50만 명이 끌려갔다. 그것도 모자라서 용케 탈출한 사람들은 압록강 변에서 청과의 약정으로 귀국을 저지하는 국가권력 앞에, 또 다시 좌절하고 말았다. 이쯤 되면 그들의 국가는 어디였을까?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던 보통사람들은, 외세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노예로 끌려갔다. 도덕국가 조선의 명분과 의리는 오직 왕과 양반 사대부를 위한 통치 논리였을 뿐이었다. 부국강병이나 민생은 외면한 체 오직 권력획득과 유지를 위한 왕과 양반사대부의 당쟁으로 골병이 든 나라였다. 이들에게는 국가도 백성도 없었다. 패당적 논리와 오직 사리사욕만 있을 뿐이었다.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 역사시간에, 한반도가 유달리 많은 외침을 받은, 그 원인을 물어보았다. 역사 선생님은 평형저울을 칠판에 그리셨다. 그리고 평형 저울의 한쪽 잔에만 물을 채웠다. 그리고 “잔이 차면 넘치고,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평범한 선문답(禪問答)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 말뜻을 지금 생각해보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의 균형추가 무너져 그 피해를 고스란히 우리가 당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간단히 비유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반도는 과거부터 국제정세 속에서 힘의 논리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된 경우가 많았다. 유사 이래 가장 잔인한 살육과 노예전쟁인 왜란과 호란도 이웃 국가들이 서로의 힘을 비축하고 나누는 과정 속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한일합방과 6.25전쟁도 국제적인 힘의 이동(power shift)과정에서 발생하여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도 우리는 초강대국들의 힘의 균형점에 끼어서 버겁게 버텨내고 있다.

우리의 국력은 과거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하여 졌다. 그러나 경제적, 군사적인 측면에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소국일 뿐이다. 그래서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결정된다. 얼마 전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있지 않고 우리에게 합의를 이끌어낼 힘도 없다”는 대통령의 고백이 가슴을 멍하게 만들었다. 400년 전에도 오늘과 같은 상황전개와 이유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정말로 조선은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었을까?

7년간의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통일정부와 개항으로 국부를 쌓고 조총 등 의 무기로 강한 군대를 만들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정예군과 권력유지를 위한 당파적 분쟁으로 훈련조차 할 수 없었던 약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겨우 8천명의 정예군과 ‘자기 몸조차 가누기 힘든 노약자, 나무, 소, 닭, 개의 이름을 군적에 등록(토정유고)’하는 사욕에 눈이 먼 부정이 만연된 군대였다. 또 전쟁을 수행할 무기로 활은 그들이 가진 조총의 성능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경제를 일으켜 민생을 안정시키고 강한 군대를 육성해야 할 양반 사대부등 지도층은 권력을 잡기위한 당리당략으로 국론은 분열되고 당쟁으로 날 새는 줄 몰랐다. 사익에 눈이 먼 양반사대부의 수탈로 농민은 몰락하고, 침몰하는 경제는 양민조차 노비로 만들었다.

그렇게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논리는 우리의 희망과 무관하게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정예군 8천명과 16만 명의 싸움이었던 임진왜란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 군대가 아니었다. 바로 죽음을 각오로 지켜낸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대첩이었다. 여인들은 치마폭에 조약돌을 날랐고 스님의 가사장삼도 피로 물들여진, 민관이 혼연 일체된 저항이었다.

조선말에도 경제를 일으켜 민생을 안정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강한 군대와 결사항전(決死抗戰)의 국론통일이 있었다면, 과연 그들이 한반도를 넘보았을까? 하지만 양반 사대부 등의 지도층은 부국강병의 치열한 논쟁보다 사리사욕과 패당적 이기심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반대를 위한 반대 논리로 당쟁만 일삼았다.

그 결과 전쟁다운 전쟁도 하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겼다. 강대국들에게 한반도는 그들 싸움의 전리품정도였다. 왜란과 호란 등 등 외세 침략으로 노예로 팔려나간 민족의 아픈 역사는 다시 되풀이 되었다. 일제 35년은 왜란을 통해 익숙하게 학습된 침탈의 재현이었다. 나라조차 빼앗긴 조선반도의 백성들은 성노예가 되고 총알받이가 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국제적인 파워게임의 대척점에서 있다. 그 정치적 성격이나 구조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주변 강대국들의 힘겨루기에서 우리나라의 운신 폭은 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치욕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최소한 과거의 잔혹한 역사의 현장과 기록을 보존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는 일이다. 깨어있는 눈을 통해 과거를 다시 조명하고 통찰하여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

오매불망, 나라를 되찾은 70 여년의 짧은 세월, 민주의 모태에서 태어난 선량들이나 지도자들이 민생이야 죽든 살든, 나라가 골병이 들든 말든 나만 잘 살고, 내 편이 권력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경제를 부흥시켜 국부를 쌓고, 이를 바탕으로 강한 군대와 국력을 키워 도둑들이 넘보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국민들은 최소한, 반대를 위한 반대나, 무절제한 자유가 만들어내는 괴담과 국론 분열을 막아내는 지혜를 찾아야 한다.

정당은 정파적 손익계산을 떠나 국민과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더욱 치열하게 추진할 일이다. 자기만 잘살면 그만이란는 이기적 개인주의나, 자기 패당이 권력만 잡으면 최선이라는 집단적 이기주의는 모두가 경계하여야 할 일이다. 그리고 치욕스러운 과거의 역사에서 짐승처럼 사고 팔린 노예로서가 아니라, 책임질 줄 아는 자유인으로서 보호 받아야 될 인권의 가치를 다시 계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병현 미래인재역량개발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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